희망도 없고 비전도 없다. 이 푸른 오월에 희망을 말해야 하건만 아직은 희망을 말할 수 없다. 철저하게 소외되고 버림받은 기분이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따져보자면 자신의 과오가 크기에 무작정 하늘에 대고 희망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린 잘못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토록 줄기차게 ‘새롭게 날마다 새롭게’를 외치며 희망을 말하던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은 잊을만하면 묵은 상품을 포장지만 바꿔서 새 것처럼 내놓고 있다. 누가 그런 권한을 주었는지, 누가 그렇게 맘대로 하라고 했는지 모르는 세상이다.
지금은 캐논(正典)이 있을 수 없는 시대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주변에는 그런 남성적인 용어들이 선동하고 있다. 그러니 희망이 있을 수가 없다. 희망이라는 것은 단지 흐름일 뿐이다. 이 말이야말로 여성적인 말이고 남성이 희망을 말한다는 것은 여자를 현혹하기 위한 용어일 뿐이다. 철저하게 권위를 버려야 하고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적인 생각을 갖는 자들만이 생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조직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남성에게는 희망이 없다.(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말하려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래서 혼란스럽고 뚜렷한 지향점도 없이 애매하며 각자가 자기의 주장이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말하기가 힘들며 단지 관계만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최초의 여자인 판도라에게서 나온 말이다. 아름다움, 설득력, 음악 등 모든 선물을 다 받은 판도라는 호기심이 강하였고 어느 날 집안에 있는 쓸모없게 보이는 상자를 열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선물들을 잃었고 인간에게 몹쓸 것들로 가득한 상자에서 마지막 남은 것이 희망이었다. 인간이 온갖 재앙에도 결국 견디는 것은 이 희망이라는 마지막 선물 때문이다. 희망이라는 것은 가장 힘들 때 서로를 위로하면서 사용하는 단어이다. 희망을 말한다는 것은 지금 힘든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말하는 것은 상대편이 자신과 같은 처지여서 위로받고 싶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희망 장사를 하는 것은 인간의 연약한 마음을 속이는 것이다.
고물상에는 희망이 있다. 한때 애지중지했던 세상의 온갖 물건들이 주인의 버림을 받았지만 재생의 꿈이 있다. 그곳에서의 물건들은 단지 무게로 가격을 매기는 모양이나 이력은 따지지 않는다. 손수레에 파지나 빈 종이박스를 주워 온 사람도, 자전거에 살림도구를 싣고 온 사람도 몇 푼의 돈이 한없이 귀중하다. 철거공사란 스티커가 붙은 트럭의 운전자도 마당 쓸고 동전 줍는 기분으로 몇 장의 지폐를 받고 환하게 웃는다. 그네들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런 희망을 갖고 다시 일터로 간다. 세상이 다 일터이다. 버림받은 것들을 위로하고 달래어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희망이란 말을 빼면 세상살이의 존재 이유가 막연하다. 하지만 희망이 있느냐고 물으면 그네들은 분명 무슨 얼어 죽을 희망이냐고 대꾸할 것이다. 

유봉관 · 시인 ·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