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길고 무더웠던 여름 탓인지 조심스레 왔다가 조용히 떠나려는 이 가을을 그냥 보내기가 아쉬워서 그 마지막 모습이라도 배웅코자 지난 토요일 가까운 남산 둘레길 산보에 나섰다. 동국대 정문을 지나 계단을 한참 올라가니 길이 좌우로 갈린다. 왼쪽 길은 남쪽을 향하는데 그 쪽은 벚꽃 길로는 서울에서도 최고인 줄을 익히 아나 단풍으로는 어떨까 싶어 평소 안 가던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북쪽을 바라보며 시내 중심부를 내려다 보는 완만한 길이다. 멀리 익숙한 북한산도 보이고 북악. 인왕산도 보이니 마음이 포근한 기분이었다. 
몇 분을 걸으니 단풍나무들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이쪽은 아무래도 단풍길이 제격인 모양인데 너무 편안한 길이라고 해서 거의 걸어본 적이 없는 곳이라 새삼스러웠다. 이윽고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단풍나무들이 보란 듯이 하늘을 가리는 길이 나타났다.
단풍나무도 종류가 많아서 어떤 것은 초록 그대로 이고 다른 것들은 노랗고 빨갛고 색동 옷처럼 화려해서 나이든 이들의 마음까지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사진을 몇 장 찍고 회현동쪽으로 계속 걸어가니 올해 본 단풍중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길에 들어섰다.
산책 나온 많은 사람들이 사진 찍기에 바뿐 모습이었다. 나도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한장 찍고 그래도 떠나기가 아쉬어 한참을 머물다가 점심시간이 지났음을 알고 필동 ‘한국의 집’ 인근에서 식사를 하고자 전에 KBS본관이 있던 곳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큰 길을 지나쳤기에 옆으로 난 흙 길을 따라 내려가니 뜻밖에도 420 여년이 지난 은행나무 두 그루를 발견하니 횡재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나 토요일 산보의 횡재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은행나무 옆 아래로 내려오니 위안부 추모 조형물이 보였다. 왜 여기에 그걸 만들었을까 의아해하며 다가가니 이곳이 일본의 조선통감 관저 터라는 표지석이 있었다. 이 일본의 조선통감 관저에서 1910년 8월 29일 소위 을사 5적인 이완용 총리대신 등이 3대 일본통감인 테라우치 마사타케를 찾아와서 조선왕국을 일본황제에게 헌납하는 일한 병합조약에 서명한 곳이라고 한다.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조성위원회가 정부예산 지원없이 시민 2만여명의 기부금을 받아 올해 8월29일 이곳을 위안부 추모공원으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또 웬일인가? 그 곳에는 3미터는 됨직한 화강암 비석이 한문글자(男爵 林權助郡像)가 거꾸로 보이게 뒤집어져 세워져 있었다. 실수일까? 그럴 리는 없을 터이니 무슨 사연인가 싶어 다가서 보니 조선주재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공덕을 기리는 그의 동상에 붙어 있던 비석이었다. 그 비석을 거꾸로 뒤집어 세워 놓은 것은 그의 역사적 책임을 묻는 뜻이라는 것이었다. 1899년 조선주재 공사로 부임한 곤스케는 1905년 11월17일 덕수궁 중명전(정동극장 뒤) 에서 이 조약을 강요하려 조선을 방문하여 고종을 협박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이완용이 가져온 관인을 찍어서 을사늑약(일제에 의해 강제된 한일 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 등을 일본이 박탈)을 체결케 하는 공로를 세운 인물이다.
그는 이렇게 한일병합의 길을 열은 공로로 일본 천황으로부터 남작이라는 작위를 받았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후 그 관저에 동상까지 세워준 것이다.

 최병효 / 주 노르웨이대사, LA총영사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