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을 주머니’에는 친숙한 단어가 가득하다. ‘허수아비’, ‘노오란 들판’, ‘밤’, ‘대추’, ‘감’, ‘코스모스 길’, ‘시골’, ‘호두’, ‘미자, 숙자, 정자, 미숙이, 순님이, 연미’, ‘개똥이’, ‘소똥이’, ‘마을 어귀’, ‘친구들’, ‘휘어지는 부모님의 허리’, ‘떠날 때만 기다리고 기다리던 정류장’ 등이다.  딱히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하면 ‘행복한 선물’이다.

아버지를 찾아 떠난 고향길, 우연히 발길이 머문 곳은 추억 만땅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 교정이다. 건물은 그대로다. 교실을 찾았다. 나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의외의 풍경이었다. 그 시절, 우리가 매일매일 반들반들하게 초로 광을 내며 청소했던 나무 교실 바닥은 그 어디에도 없다. 당황스럽게도 그곳은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꿀꿀끌 ‘돼지’다. 대박이다. 

어느 시골 청년이 폐교된 나의 모교를 임대로 분양받아 돼지를 사육하는 사업장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나마 운동장도 관사도 자두나무, 은행나무도 그대로 남아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그럼에도, 가을이면 노랗게 물들던 은행나무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축축 늘어지고 있다. 사람 그림자를 보기 힘든 시골에서 은행나무 관리는 무리한 희망고문이다.

함께한 가족과 턱허니 그곳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시작(詩作)’ 노트와 ‘연필’을 꺼냈다.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나는 것을 시로 백지를 끄적끄적 채워갔다. 선선한 가을바람과 추억의 운동장은 영화에서나 연출될 수 있는 한 장면이다. 축구골대 뒤, 오솔길을 따라 피어 있는 코스모스가 바람에 흩날린다. 가을이 행복한 이유가 바로 내 눈 앞에 그림처럼 다가오고 있다.

<하편에 계속>

박여범 / 용북중학교 국어교사·문학박사·문학평론가·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