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산벚나무 이야기

봄날이 가고 있다. 봄을 꽃 시절이라고 할 때 지금은 확실히 클라이막스는 아니다. 도로변의 벚나무들은 이제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꽃나무는 아니다. 가지에는 푸른 잎사귀들만이 무성할 뿐이다. 낙화시절을 보내다 보면 유정해지다 못해 비감하게 된다. 산벚나무들마저 꽃 조각을 날리고 있는 때이니 왜 아니 그러랴.
전북 지역이 다 그러리라싶지만 전주는 사월 중순이 가장 아름다운 때이다. 어느 산 어느 언덕을 둘러보아도 산벚나무들의 전성시대이다. 만발한 꽃들이 희고도 포얗게 산과 언덕을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효자동 쪽에서 보는 장군봉과 옥녀봉이 눈부시고, 남부시장 쪽에서 바라보는 투구봉과 매화봉이 눈부시다. 남천교나 싸전다리에서 보는 중바우와 기린봉이 눈부시고, 평화동에서 바라보는 완산 외칠봉 자락이 눈부시다. 나는 산벚꽃들을 보면서 매번 감탄사를 연발해왔는데 올해는 그 감탄사의 소리가 더욱 커졌다. 나는 산벚나무들과 관련하여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산벚나무들은 매년 사월 중순을 기다려 새색시처럼 화려하게 분발라 화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월 하순의 끝자락이다. 화무십일홍을 마음에 새겨야 할 때이다. 벚나무들이 그랬던 것처럼 산벚나무들도 꽃자락을 발치에 깔고서 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신록의 계절을 향하여 머리를 쳐들고 있는 것이다. 이때쯤이면 나는 산벚나무들을 놓아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먼 옛날 산벚나무들이 어떻게 아름다운 문화재가 되고 인류의 문화유산이 되었는지를 묵상할 차례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온 국토가 몽골군의 말발굽에 유린당하던 고려 때의 일이다. 고종 19년인 1232년 몽골의 대군이 침략했을 때, 대구 부인사의 초조대장경판이 잿더미가 된 사건이 있었다. 그때 조정의 대응이란 강화도로 쫓겨가는 게 고작이었다. 최우를 비롯한 무신 정권도 몽골군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릎을 꿇고 항복할 수는 없었다. 항전의지가 강렬했던 것이다. 집권세력은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내는 어떤 구심점을 찾아내야만 했다. 요즘 말로 하자면 그 어떤 커다란 이벤트 사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무력(武力)으로는 도저히 몽골군을 이겨낼 수가 없으니 불력(佛力)으로 몽골군을 물리치자는 것이었다. 선대의 조정 때 초조대장경을 새기자 뜻밖에도 거란군이 물러갔던 사례가 있었기에 그 같은 프로젝트는 백성들의 호응을 받을만했다. 고종 23년인 1236년부터 38년인 1251년까지 16년간에 걸친 대역사는 그렇게 진행되었다. 팔만대장경은 바로 그 소산이다.
팔만대장경이 고려 조정의 염원대로 불력을 발휘해 몽골군을 물리쳤는지는 물어보지 않기로 하자. 몽골은 유라시아를 휩쓰는 세계 최강의 나라로 비대해져 갔으니 말이다. 훗날 고종은 결국 태자를 원나라에 볼모로 보낼 수밖에 없었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고종자신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팔만대장경이 오늘날 아무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고려인들이 몸과 마음을 바치고 눈물과 땀방울을 바쳐서 끝끝내 완성해낸 그 저력과 그 정성이 너무 놀라운 것이다.
아는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는 비밀이 있다. 팔만대장경 목판은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로 만들어졌다. 박달나무나 거제수나무나 단풍나무나 후박나무도 더러 섞여있는 게 사실이지만 주종은 두 종류이다. 그런데 오늘날 목판을 만들 정도의 돌배나무는 산야에서 만나 보기가 어렵다. 하지만 산벚나무는 그렇지가 않다. 봄마다 온 산을 희고도 포얗게 장식하는 나무들 중에는 제법 덩치 큰 친구들도 있는 것이다.

/이희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