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는 진통제이다.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고 통증 깊은 세월을 졸업하려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리라는 생각이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매화 봉오리들이 한 송이 두 송이 피는 걸 보는 것은 행복이다. 시골길을 산책하다가 어느 민가의 돌담너머로 매화 가지들이 하얗게 만발한 것을 보면 가슴이 설렌다. 저절로 발길이 그쪽으로 끌리는 것이다. 꽃의 생김생김을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면 거기 꿀벌들이 날아다니고 있다. 매화꽃과 꿀벌은 아무 고뇌가 없다. 천진난만한 생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게 신기하게 느껴져서 심오한 구절이 돋을새김 된 그 어떤 명시(名詩)보다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그때쯤 나는 꽃나무 앞에서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명상의 음악을 상상하기 마련이다.
매화나무는 낙엽교목으로 중국이 원산지다. 그러나 매화는 중국인만의 꽃은 아니다. 한국인에게도 매화의 기품을 흠모하는 정신이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백과사전은 매화나무가 2천 년 전에 들어왔다고 알려주고 있다. 2천 년 전이라면 삼국시대 초기이다. 하지만 백과사전의 소개를 곧이곧대로 믿을 것은 아니다. 어쩌면 매화나무는 그 이전부터 한반도에서 자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우리 조상들은 매화를 예찬하는 글과 그림을 많이 남겼다. 매화는 이른바 사군자 중의 하나이다.
매화는 여러 가지로 사람을 이롭게 한다. 매화가 정신적인 면으로 큰 위로를 주고 있다면 매실은 사람의 몸에 좋은 식품과 약이 되고 있다. 매실주는 물론이고 장아찌를 담그거나 건강음료를 만드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방에서는 매실을 오매(烏梅)라고 하는데 기침과 설사에 효능이 있다. 목이 붓고 아픈 증상에도 약으로 쓴다. 볶은 매실씨도 가루를 내서 복용하면 몸을 튼튼하게 하고 눈을 맑게 한다.
매화나무는 건조한 날씨에 강하고 추위에도 잘 견딘다. 그래서 매화나무는 한국 땅 어디에서나 볼 수가 있다. 매화나무는 생장이 빠른 편이고 가꾸기도 쉽다. 번식은 씨를 심거나 꺾꽂이를 통해서 하고 특별한 품종을 보려면 접붙이기도 한다. 한국의 거의 모든 매화는 홍매화든 백매화든 청매화든 홑꽃이다. 그래도 겹꽃을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매화도 벚꽃처럼 겹꽃 품종들이 있다. 아직 낯선 이름들이기는 하나 흰색겹꽃이 피는 것을 많첩흰매화라고 하고 붉은색겹꽃이 피는 것을 많첩홍매화라고 한다. 그리고 능수버들처럼 가지가 아래로 늘어진 능수매도 있다.
매화가 나에게 진통제라고 했는데 요즘처럼 세상이 어수선할 때는 더욱 그렇다. 이제 겨우 석 달이 지나고 있을 뿐인데도 올해는 여느 해보다도 큰 뉴스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어지러운 잔해를 남기고 있다. 눈과 귀를 통해서 들어온 그 뉴스들이 머릿속을 아주 쓰레기장으로 만들어버렸다. 후쿠시마 원전폭발 장면을 목도할 때만해도 방사능 유출은 일본만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지금은 한국과 중국을 포함해 동남아시아의 고민거리가 돼버렸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방사성 요오드와 세슘이 공기를 오염시킨 것이다. 그래도 그 양이 극히 적어서 인체와 자연에는 별 영향이 없다니 매화나무 앞에서 심호흡을 해본다.
섬진강 매화가 지금 절정이라는 소식이다. 매화꽃 구경을 나온 인파들의 행렬이 텔레비전 화면을 가득히 채우고 있다.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찬란한 계절을 보내고 있을까. 매화 욕심이 많은 나는 단속사지 정당매(斷俗寺址 政堂梅)도 보고 싶고, 남명매(南冥梅)도 보고 싶고, 황동규 시인처럼 선암사 매화도 보고 싶지만 직접 찾아가지는 못하고 있다. 인터넷 여행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그저 탄성을 삼키고 있을 뿐이다.      
/이희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