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국제공항에서 “어머니, 잘 다녀오세요.”하는 막내아들 내외의 인사말과 함께 나는 깊은 태평양 바닷속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기분이 들어 잠시 현기증이 났었다. 난생 처음 혼자 떠나는 외국여행이어서 불안했던 마음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아들이 모든 수속을 밟아주고 비행기 안에 들어가 자리만 잡으면 되는 것인데도 막막했다. 더듬더듬 K45라는 번호를 찾아가 앉았다.
 평소 나는 매사에 능동적이라 자력생활을 할 수 있으며, 또한 어떤 일을 당했을 때 나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용감성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며 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출발 시각이 거의 다 되도록 내 옆의 두 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나는 자못 궁금했다. ‘어떤 사람이 내 이웃이 되어 12시간의 비행을 함께 할 것인가? 될 수 있다면 외국인이 아닌 내 또래의 아주머니가 옆에 앉는다면 도란거리며 갈 수 있을 터인데…….’ 하는 생각을 했었다. 끝내 승객이 오지 않은 채 비행기가 새색시 걸음으로 서서히 이륙하는 순간, 눈이 파란 외국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앉아도 좋으냐고 양해를 구하는 것 같아 나도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예, 앉으세요.’ 하고 말했다.
 헐렁한 회색 반팔 티셔츠에 단추도 두개나 열어제친 사이로 가슴에 난 갈색털이 보였고, 팔에도 털이 숭숭 나서 괜히 보기가 민망스러웠다. 여자 승무원이 헤드폰을 일일이 승객에게 나누어주는데 그것이 귀에다 꽂는 줄은 알았지만 어떻게 이용해야 될지 모르는 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그 외국인은 의자 옆 부분에 꽂아 주고 미소를 보냈다. 나도 웃음을 보낼 수밖에…….
 기내에서는 참 좋은 음악이 흘러 나왔다. 음악을 듣고 있으니, 기내식으로 저녁이 나왔는데 나는 이미 먹고 탑승하여 필요 없다고 했다. 옆 사람은 후식으로 쥬스에 커피 그리고 캔 맥주까지 받아놓고 잘도 먹어치웠다. 그러니 저렇게 배가 만삭이지 싶었다. 의자를 좀 더 낮게 젖혀놓고 잠도 잤다. 화장실에도 몇 번씩 다녀왔다. 이런 것들이 여객기 안에서의 생활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했다.
 잠시 후 비행기 안의 불이 꺼지고 창 옆에 있는 작은 등만 켜졌는데 마침 내 옆의 불은 들어오지 않아 나는 메모장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옆에 앉은 남자가 내 옆 의자를 리모컨처럼 조정하여 글쓰기 좋게 불을 밝혀주고 또 씽긋 미소를 보냈다. 영어 중에 가장 보편적인 단어 ‘땡큐’ 라는 말도 자신 있게 못한 내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또 입속으로만 고맙다고 중얼거리며 미소를 보냈다. 몇 번씩이나 배려해주는 그 사람이 참 좋아 보였는데 괜히 외모만 보고 처음에 걱정스럽게 생각한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시드니에서 멜본행 비행기로 갈아타야 된다는 어려운 문제가 내게 또 남아 있었다. 멜본에 살고 있는 큰아들이 팩스로 보낸 영문편지 내용을 옆자리 남자에게 보여 주었다. 그 내용은 우리 어머니가 초행이니 안내 좀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눈이 파란 그 남자는 읽어보더니 밝은 표정을 지으며 “oh, yes!” 하며 뭐라고 묻는데 알아들을 수 없어 고개를 살랑살랑 저으며 계면쩍게 웃었다. 그랬더니 메모지를 꺼내 한문으로 初(초)자를 적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초행이냐고 묻는 듯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시드니에 도착하여 비행장에 있는 안내원에게 멜본행 비행기를 태워주라고 나를 인계하고 "bye bye"하며 갔다. 걱정이 되는 듯 다시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너무나 고마웠다. 비록 언어는 서로 통하지 않았지만 입가에 흐르던 잔잔한 그 미소와 몸짓, 손짓으로 내 어려운 일을 해결해준 파란 하늘의 한 점 흰 구름처럼 밝은 그 이방인의 파란 눈동자가 다음 여정의 나를 조금은 안도하게 해주었다. 몇 번씩이나 뒤돌아보며 가는 모습이 지금도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 그 은혜를 갚을 것인지, 나는 본의 아니게 빚을 지게 된 셈이다.

김 호 심/부안문협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