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오동나무 아래에서 다가오는 감성을 좀이라도 깊이 받고자 눈을 감아보았다. 혼자라도 여러 벗들과 함께 하는 자리가 된 듯 든든하다.
  풍성한 잎새에 후두둑 뚝뚝, 빗방울 지는 소리는 내게 있는 고요를 무너뜨린다. 마음의 빗장을 열어 제치니 사색의 심연(深淵)은 제 멋대로 다가선다. 빗소리에 따라서 큰 것 작은 것, 먼 것 가까운 것 제 맘대로 번져간다.
  비 내리는 날 오동나무 아래에 서면, 마음이 먼저 젖어 내가 꽃이 되었다 잎이 되었다 한다. 혼자서도 많은 이야기가 통하게 되고 내 어떤 뜻도 다 받아주게 된다. 내가 주인 되고 객도 되며 대화 없는 일방통행이어서 좋다.
  나를 키워 준 초가, 그 사립문 밖에 한 그루의 키 큰 벽오동나무가 있었다. 나는 소년시절부터 이 나무를 좋아했다. 우리 마을 내 또래 예닐곱이 이 나무 밑에 자주 모이는 곳이지만 나처럼 이 나무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 나무 아래서 손님을 맞이했고 배웅도 했다. 외출하신 어머니를 기다리던 곳도 그 나무 그늘이다. 그 오동나무 아래에 서면 온 마을이 훤히 보였다. 누가 무엇을 하는지, 뉘댁 아이가 인사성이 바른지도 알 수 있는 정도였다. 사동댁 젊은 부인이 죽었을 때, 상여 행렬 바로 뒤에서 철없이 멀뚱거리며 따라가던 어린 막내 상주가 가여워, 마을 아낙들이 눈물 흘리며 흐느낀 곳이기도 하다.
  오동나무는 너른 잎새 만큼이나 품이 넉넉하다. 내게 생긴 일들을 다 감싸 안는 듯 포근했다. 산 너머 마을을 동경하며 갑갑해할 때는, 가만가만 잎새를 달싹이며 내 열기를 식혀주던 곳이기도 했다. 그런 오동나무를 잡다한 일상사에 가려 오래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오동나무를 만난 것이다. 직장에서 나와 문학의 길을 걷던 어느 날, 보라색 오동나무 꽃을 봤다. 무엇에 이끌리듯 오동나무 아래를 서성거렸다. 너무나 오래도록 잊고 살아온 향기, 옛사랑이 깨어난 듯한 감당 못할 감정이 거기서 되살아났다.
  그 후로 오동나무 꽃은 내게 연인의 향기로 안겨오고 있다. 마른 열매들 사이에서 슬그머니 보랏빛 향을 터뜨리며 바라만 봐도 든든하도록 다가온다. 앞산 초입에 보랏빛 꽃이 피면 창틈으로 스미는 향에 취하여 하얀 밤을 보낸다.
  지난봄에도 우산을 받쳐 들고 오동나무 아래를 걸었다. 비바람에 떨어진 꽃잎을 아깝게 바라보며 한 잎 두 잎 주어 봤다. 대지에 내려앉던 보랏빛 꽃잎은 가슴에 들어 온 은은한 빛깔이다. 분출하려는 마음을 동이듯, 물기 머금은 꽃잎을 매만졌다.
  벽오동나무는 봉황과 관련이 있는 나무라고 한다. 고대 중국 사람들이 상상하는 상서로운 새로 용과 함께 봉황은 바로 영물(靈物)이며, 성인이 출생할 때에 나타난다고 한다.
  벽오동나무는 봉황이 앉는 나무이어서 옛 사람들이 정성스럽게 심고 가꾸어온 특별한 복이 있는 나무이다. 태평성대를 몰고 온다는 봉황새가 벽오동나무에 내려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런 옛 시조도 있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잣더니
  내가 심는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 오고
  밤중에만 일편명월(一片明月)이 빈 가지에 걸려있네.

  모화(慕華)사상에 짙은 옛 선비들이 이토록 벽오동나무를 좋아 했던 것이다. 가을로 접어들면 익어 가는 열매의 모양이 너무 신기하다. 작고 오목하여 마치 조그마한 장난감 보트처럼 생긴 껍질의 가장자리에 쪼글쪼글한 콩알 크기의 열매가 3-4개씩 붙어있다. 건드리면 금세 톡! 하고 떨어질 것 같이 보이지만 껍질이 바람에 멀리 날아가도 땅에 닿을 때까지 는 꼭 붙어있다.
 '몇 해를 꽃 피우다가 나중에는 거문고 되어 대청에서 울어댄다니, 벽오동나무는 여러 가지로 우리 인생에 특히 예술면에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곽 병 술/시인ㆍ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