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어야 산다

옛말에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라는 속담이 있다.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라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말이다. 또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체면치레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다. 뭐니 뭐니 해도 먹는 것이 남는 것이다. ‘사람은 먹어야 산다.’ 이 말은 예부터 내려오는 제1의 진리다. 그러니 먹는 것은 곧 생존의 문제다.
우리 몸은 영양분이 부족할 때 ‘허기’라는 고통을 느낌으로써 아주 작은 먹이라도 찾게끔 설계돼 있다. 그리고 먹을 때의 ‘쾌감’은 그동안의 노고를 단숨에 잊기에 충분하도록 진화해 왔다. ‘타는 갈증’은 인간이 마지막 한줌의 기력을 짜내 물 쪽으로 향하게 하는 ‘처절한 욕구’의 다른 말이다. 지적 호기심이나 오락은 사실 배부를 때 이야기다. 사흘만 굶어 보라. ‘남에 집 담 안 넘어가는 사람이 없다.’는 말처럼 눈에 쌍불을 켜고 먹을 걸 찾아 나설 것이다. 우리 몸은 그렇게 프로그램 돼 있다.
사실 먹는 즐거움만큼 행복한 것은 없다.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는 인생을 논할 때 종종 등장하는 질문이다. 실상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은 없다.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 극한 상황에 치달으면 이 명제는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우리만큼 밥을 소중하게 여기는 민족은 없는 것 같다. 배고프면 꽁보리밥을 고추장에 비벼먹어도 맛있고, 김치 한 가지만 가지고 먹어도 밥 그릇 뚝딱이다. 또한 라면을 먹어도, 쑥개떡 한 조각을 먹어도 꿀맛일 것이다. ‘밥은 보약’이라는 짧은 경구(警句)나 ‘밥 한 알이 귀신 열을 쫓는다.’는 속담에서처럼 밥은 생존의 수단, 그 이상이었다. 나아가 동학의 2대 교주였던 해월 최시형 선생은 ‘밥은 한울님(하늘)’이라며 받들었다. 이는 ‘밥은 생명이요, 하늘’이라는 시인 김지하의 밥 사상과 같은 맥락이다. 생명과 번영을 상징하는 밥은 우리네 삶을 폭넓게 지배했다. ‘누워서 음식 먹으면 가난해진다.’ ‘남은 음식을 버리면 가난해진다.’ ‘우물가에서 밥알을 떠내려 보내면 3대가 빌어먹는다.’ 등등의 격언은 밥을 경배한 조상들의 생활철학을 담고 있다.
1980년대 중후반쯤으로 기억된다. 당시 군사정부 시절, 민주화를 외치는 시위가 끊이질 않았다. 곳곳에 시위진압으로 인한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고 전국 시내 주요 도로에서 전경과 대학생들의 대치가 지속되었다. 당시 난 서울에서 생활할 때인데, 어느 날 외국 대사관 앞을 지나는데, 전경들이 담벼락에 몸을 기대거나 인도에 주저앉아 점심을 먹는 광경을 목도했다. 시위군중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백 명의 전경들이 된장국과 깍두기와 졸인 생선 한 토막이 담긴 식판을 끼고 꾸역꾸역 밥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반대편에 있는 시위 군중들도 점심을 먹고 있었다.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준비해온 도시락이나 배달시킨 자장면을 먹는다. 길을 걷다가 시위대와 전경들의 밥 먹는 모습을 보고 새삼 ‘먹어야 산다.’는 명제를 떠올리게 됐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같이 밥을 먹으라고 한다. 마주보며 음식을 먹다보면 서로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어 절로 대화가 된다는 것이다. 함께 밥을 먹음으로써 상대의 기호를 알 수 있고 그것에 맞춘 대화가 절로 이루어지고, 그로 인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중요한 것은 누구와 먹느냐에 따라 음식의 맛이라든가 대화의 내용이 달라질 것이다.
밥은 신성한 것이다. 그 밥을 담는 밥그릇도 소중하다. 그래서 남의 밥그릇을 팽개치거나 깨뜨리는 건 예로부터 사생을 결단할 만한 충분한 사유가 되었다. 조폭들의 피비린내 나는 영역다툼도 따지고 보면 ‘밥그릇 싸움’이고, 힘없고 서러운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의 횡포에 맞서 노동조합을 만든 것도 남이 지켜주지 않는 밥그릇을 노동자 스스로 지키자고 하는 것이다.
이렇듯 밥그릇은 누구에게나 소중하지만, 밥그릇이라고 해서 모두 다 신성한 것은 아니다. 남의 몫을 덜어내서 제 몫을 늘리려는 자의 밥그릇은 탐욕 그 자체일 뿐, 신성함과는 아예 거리가 멀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손쉬운 방법으로 채우는 밥그릇 역시 떳떳하지 않다. 모름지기 신성한 밥그릇이란 이마에 땀방울 송골송골 매달아 가며 한 톨 한 톨 채우는 것이어야 한다.

신 영 규/영호남수필문학협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