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다. 해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한 장 남은 달력 속에 만감이 교차한다. 정월 초하룻날 어떤 생각을 했으며 무엇을 설계했을까. 지나고 보니 해 놓은 건 아무것도 없고 누에 뽕잎 갉아먹듯 시간만 축내고 앙상한 줄기만 남았다. 지난 1년의 시간을 돌려보면 아쉬운 필름만이 허공에 돌고 다시 잡으려 손을 내밀어도 기약의 언질도 받지 못한 빈손이다. 비우면 다시 채워지는 이치를 모를 리 없지만 한 치 앞도 모르는 숙맥이 되어 또 자신을 원망하며 미워한다.
 나는 죄인이다. 죄인 중에서도 시간을 허비한 중죄인이다.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데, 금쪽같은 시간을 강물에 띄워 보냈으니……. 마치 손에든 보석을 놓쳐버린 듯 허전한 마음, 허무한 마음, 공허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 흘러버린 시간들이 가시 되어 늑골을 찌른다.
 일 년 중 가장 짧은 달은 2월이지만, 가장 빨리 지나가는 달은 12월이 아닐까 싶다. 새해를 맞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별반 해놓은 일도 없이 벌써 한 해가 다 지나가는가 싶어 마음이 급해지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연말 분위기에 휩쓸려 각종 모임들이 이어지다 보면 12월은 휑하니 바람소리만 내며 지나치는 무정차 버스처럼 되기 십상이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달력의 이름을 마음의 움직임이나 자연, 또는 풍경의 변화를 보고 지었다고 한다. 부족마다 달랐겠지만 인상적인 달 몇 가지를 들면 1월은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달, 3월은 마음을 움직이는 달, 4월은 씨앗을 머리맡에 두고 자는 달, 5월은 오래전에 죽은 자를 생각하는 달, 7월은 열매에 빛을 저장하는 달, 11월은 모두가 사라진 것은 아닌 달, 12월은 무소유의 달, 침묵의 달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와서 생각하니 일면 일리가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나는 12월을 마음의 달로 정하고 싶다. 12월은 지나온 1년 세월의 희로애락을 총 결산하는 달이기 때문이다. 
 매년 이맘때면 늘 되풀이 하는 말이지만 올해 역시 ‘다사다난’, 또는 격동의 한 해 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정말이지 올 한 해 대한민국은 이념과 정쟁을 두 축으로 극심한 대립과 혼란에 빠졌었다. 민주주의라는 게 원래 시끄럽고 어수선한 것이라고 하지만 국내 정치가 자꾸 후퇴하거나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느낌이다. 먼저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을 놓고 정치권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선 불복이다, 헌법 불복이다, 하며 눈만 뜨면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여야 정치권이 무엇 하나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끊임없는 대결의 악순환을 계속하는 것을 보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야당을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은 채 독선과 독주를 거듭하는 새누리당 행태는 절망감마저 들게 한다. 민주당 역시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여당의 일방적 독주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기로에 서 있다. 서녘에 몸을 쉬는 눈부신 저녁노을은 하루 일손을 놓고 그날을 조용히 되돌아볼 수 있게 해 준다. 인간 정신의 위대함은 뭐니 뭐니 해도 자기성찰에 있는 것이다. 놀람과 격정, 분노로 이어졌던 한 해였지만 잘 마무리하자. 그리하여 미움을 내려놓고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눠지고 희망의 노를 저어가자. 원천이 고갈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찰찰 넘쳐흐르는 폭포수와도 같은 희망의 힘으로 대한민국 천지와 세계를 진동시켜 보자. 정부와 정치권은 국민들에게 이러한 희망의 힘을 선물하는 정치를 펼쳐야 할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대립과 갈등을 걷어치우고 진정성 있는 대화를 나누게끔 소통의 모범이 돼야 한다.
 차가운 바람에 손끝마저 아려오는 겨울이다. 겨울이 세상을 온통 얼어붙게 하는 것 같지만, 우리 생각 밖의 어느 곳에선가 매화는 피고 있다. 찬바람 불고 새벽 운무가 가득 깔린 시간에도 여명(黎明)은 저 혼자 오고 있지 않는가. 상실 안에는 또 다른 희망도 움트는 법이다. 모든 것은 함께 있다. 우리 모두 자신을 내려놓고 생각해보자. 12월은 마음을 내려놓는 참회의 달이다.

 신 영 규/전북문협신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