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나무 사이로 해는 지고 어둠이 내린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 잿빛구름이 가득하다. 아니나 다를까, 초겨울 추위가 사흘째 이어지면서 제주와 충남ㆍ전북 서해안지방에 첫눈이 내렸다. 아직 가을은 겨울에게 바통을 넘겨주지도 않았는데, 겨울이 서둘러 달려온 것일까?
 사실 입동이 지났으니 이제 절기상으론 겨울이다. 더구나 눈까지 내렸으니 겨울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이런 겨울을 두고 서양에는 오래전부터 전하는 격언이 있다. ‘겨울은 신이주신 계절이다.’는 것. 추위 때문에 집안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은 자기의 내면을 살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며, 한편으론 그 성찰이 많은 문학작품으로 남을 것도 사실이다.
 1년 열두 달 중, 또 한 번의 12월이 다가오고 있다. 한 해의 마지막과 새로운 해의 시작을 맞이할 즈음이면, 평소 염두에 두지 않았던 시간의 흐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시간에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일까. 시간 자체는 끝없이 이어지는 흐름임에도 사람들이 편의상 시간을 마디 내고 시작과 끝이란 인위적인 구분을 해놓았다. 사람들은 실질적인 이유에서건 심리적인 이유에서건, 시간에 매듭과 마디를 지어놓았다. 그리고 시간의 여러 마디마다 시작과 끝을 두었다. 하루, 한 달, 한 해에 시작과 끝이 있고, 삶에도 삶의 시작인 출생과 삶의 끝인 죽음이 있다. 그렇다면 죽음은 진정 삶의 끝이며 존재의 마지막인가? 삶과 죽음은 결코 둘이 아닌 한 몸이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 즉, 삶이 죽음이요, 죽음이 곧 삶인 것이다. 일단 생을 부여받은 사람은 죽음이란 숙명을 피할 수가 없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살아 있는 존재에게 죽음은 어김없이 다가온다. 다만 시간과 삶을 어떻게 가꾸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문제의 답은 달라진다.
 대자연의 무상함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전해준다. 오늘 이 몸이 젊다고 마냥 젊음이 그대로 이어질 수 없고, 오늘 이 몸이 온전하다고 내일도 온전하다는 보장이 없다. 정말 한 생각을 돌이켜보면 오늘 하루 내가 열심히 살아간다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실존적인 사실은 내가 열심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인간은 누구든 목적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목적 없는 인생은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조각배와 같고, 사하라 사막에서 나침반 없이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는 존재와 같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뭘까.’ ‘무엇을 해야 하는가.’등 이런 질문들은 인생행로에서 누구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화두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살아오면서 어떤 생각의 씨앗을 심었고, 지금 그 열매는 얼마나 열렸는가. 남을 위해 무얼 봉사하였는가. 바람 부는 늦가을 종착역에 서서 내 삶을 반추해본다. 하지만 아무 것도 이뤄놓은 게 없다. 빈 깡통이다. 때론 삶이 허무하고 부질없다고 느낄 정도니 비관론이 우세하다. 이는 평소 내가 뿌린 노력의 씨앗이 부족했다는 증거이다.
 무엇을 심었는가? 그 씨앗이 자라서 지금의 세상을 체험한다. 내가 심었던 씨앗이 자라서 지금의 현실을 만든다. 무엇을 심었던가? 그 씨앗이 자라 나에게 열매를 준다. 그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현실이 고통인가, 행복인가,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 내가 선택했고 내가 심은  결과이다. 미래는 지금 내가 생각하고, 마음먹고, 말하고, 행동한 씨앗이 자라나서 추수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한 치 오차 없는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모든 것은 자신이 지어놓은 결과요, 자신의 업보다. 모든 것이 나의 모습이고 내 삶이며 나의 결실이다. 그러므로 울어도 내 인생이요, 웃어도 내 인생이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코끝을 시리게 하는 초겨울이다. 가을이 겨울의 옷깃을 부여잡고 몸부림치는 이때 우리 모두 눈을 감고 자신의 삶을 반추해보자.  

신영규/전북수필 주간 겸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