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옷을 입고 빨간 주먹을 쥔 감나무들이 철길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다. 어느 동네 어귀에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가 싯누런 옷을 입고 한가롭게 서 있다. 간간이 얼굴 붉힌 산들은 맑은 강물을 응시하고, 들녘엔 가을 추수하는 농부들의 손놀림이 능란하다.
산비탈 즐비하게 늘어서서 서걱거리는 억새의 노랫소리가 우렁차다. 그래서 가수 고복수는 “아~아!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인가요.”를 불렀는가보다. 산맥들 강물에 누워 흔들리고 쪽빛 하늘가 그리움에 젖은 영혼들은 하얀 머리칼 풀어 헤치고 애타게 님을 그려본다. 빛바랜 사춘기 노을빛 고운 만큼 번뇌는 커가고, 존재의 의미는 허위적 거리는데 깊어가는 가을의 여울목에서 달아나는 한세월만 채찍질 한다.
차창 밖 푸른 하늘과, 들길과 산 숲을 바라본다. 나뭇잎이 제멋대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바람이 소리치며 가을을 몰아가고 있다. 스산한 바람에 내 가슴이 울린다. 두런두런 열매 익어 가는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내 앞좌석에 앉은 중년 부부는 아까부터 감나무와 억새밭 등 창밖으로 스치는 가을 정취를 보고 연신, 감탄사를 날린다.
오랜만에 서울에서 부산행 기차를 타고 경북 청도 부근을 스쳐 지나며 차창으로 바라본 광경이다. 난 지금 기차 창문 밖 가을정취에 흠뻑 젖어있다. 새삼 기차 안에서 가을의 서정을 보니 가슴이 찡하기도 하고 괜시리 마음이 서글퍼지기도 한다.
봄을 찬미한 시인도 많고 여름의 정열이나 겨울의 스산한 아픔을 토해낸 노래도 적지 않지만, 계절의 모퉁이를 휘돌아 나온 가을바람만큼 영혼의 더듬이를 곤두세우는 유혹이 또 있을까? 풍족한 영혼이 아니라 가난한 영혼의 그 고독한 넋. 돌아가는 사계절의 수레바퀴 속에서 다시 옷깃 여미는 우수의 계절. 떨어지는 오동나무 잎에 묻히듯 나는 가차 안에서 골똘히 사념하며 추억의 늪에 빠져 있다.
가을은 인생에서 황혼기다. 청ㆍ장년기에 인생을 멋지게 산 사람은 가을녘에 출렁이는 황금벌판이나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단풍처럼 아름답게 비추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가을은 사랑의 계절이다. 비옥한 시간을 바쳐 경작하는 가장 아름다운 열매, 그것은 아마도 사랑의 품성이 아닐까? 무엇이든지 사랑 없이는 숨을 쉴 수도, 성장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을은 우수의 계절이다. 우수(憂愁)란 근심과 걱정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에서 풍기는 ‘뉘앙스’는 상당히 서정적이다. 마치 커피 향과 같은 잔잔한 멋이 배어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별의 비극도 자신이 겪으면 말로 형언키 어려운 고통이고 남이 보면 아름다운 드라마같이 보이는 것과 일맥상통한 해석일까? 아무튼 그 근심과 걱정의 주제가 모쪼록 아름다운 것이기를 기대하면서, 또 우수란 가을같이 습관성 기분장애의 한 계절에만 방문하는 부유층 고객이 아니다. 우수에 젖은 눈이며, 우수를 머금은 미소같이 일상에서 상대를 통하여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점이나,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관한 글귀 중에서 ‘낯선 고장을 헤매노라면 더러는 옆구리께로 허허로운 나그네의 우수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간다.’ 에서도 발견되는, 비교적 빈도수가 높은 단어임에도 앞서 언급하였듯이 단순한 근심과 고통보다는 다소 사치스러운 분위기로 느껴진다.
가을은 고독의 계절이다. 고독하기에 절대자를 찾고, 가난하기에 진실한 위로를 갈구한다. 진실의 시간은 낙엽이 지는 때를 기다려 홀연히 찾아든다. “새도 죽을 때는 지저귐이 애달프고,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말이 착하다.”증자(曾子)의 격언이다.
누가 가을을 비애의 계절이라 했던가. 가을이 오는가 싶으면 낙엽이 거리를 구르다 금시 떠나버리고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는 나무들의 안쓰러움, 세월 자락 고달픔 견디지 못해 한줄기 바람에 뒹구는 낙엽. 누가 가을을 슬픔의 계절이라 했던가. 갑자기 우수의 철인 쇼펜하우어가 되는 느낌이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참되고 올바른 삶인가? 종교서적, 철학서적을 아무리 보아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하겠다. 물론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성경대로 사는 게 정답이겠지만……. 하여간 사는 대로 살자.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 그러나 답(答)이 없는 무답(無答)이 올바른 정답일 수도 있다. 무엇을 찾으려하지 말자. 물 흐르는 듯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살자. 꽃이 피면 봄이요, 좀 더우면 여름, 낙엽지면 가을이고, 눈 내리면 겨울인 듯 그렇게 살자. 무엇을 따지지도, 묻지도 말고 살자, 그것이 인생이고 삶이다. 이 가을, 차창 밖 가을정취를 보며 삶과 죽음 등 개똥철학의 한 단면을 읊조려본다.
신 영 규/전북수필 주간 겸 사무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