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소리에 마음이 젖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고요하고 잔잔하게 스며드는 빗소리에 내 마음도 흥건히 젖는다. 가을 한가운데 서서 그 누굴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나. 때마침 툇마루 쪽 창가에서 귀뚜라미 노랫소리가 허허롭다. 가느다란 선율을 타고 귓전에 와 닿는 애달픈 귀뚜리소리. 빗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귀뚜리소리가 내 마음을 우수에 젖게 한다.
노을이 지고 어둠이 내린 자리엔 오직 가로등만이 홀로 밤을 지키고 있다. 어둠이 삼켜버린 회색빛 도시 건물들을 바라보니 내 육신위에 허황한 꿈이 점점 더 깊게 내려앉는다.
하루는 이렇게 흘러가는데 허전한 마음, 가누지 못한 가슴 한켠에 자리한 그리움, 그 그리움의 실체는 무엇일까. 추억의 수평선에 불쑥 솟은 초록의 그리움들….
창을 열고 빗줄기를 바라본다. 앞집 건물 모서리에 키 큰 가로등이 하얀 빛을 흘리며 가을비를 흠뻑 맞고 외롭게 서 있다. 가로등은 쏟아지는 빗줄기에도 아랑곳없이 어둠을 밝히고 있다. 내 어렸을 적 고향마을 고샅에서 꺼져가는 빛을 부여잡고 서 있었던 그 가로등과 흡사하다.
흩어진 기억들과 잃어버린 시간의 잔해들이 푸른 가로등 불빛 아래서 빗물에 촉촉이 젖고 있다. 초가을의 길목에서 서늘한 비바람을 맞으며 홀로 서 있는 가로등이 오늘따라 애처롭게 보인다.
손을 내밀면 잡힐 것 같은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떠도는 바람은 심장 깊숙이 파고들어 가슴을 시리게 한다.
삭막한 밤, 눈을 감고 빗소리를 듣는다. 가슴에 슬픔을 통째로 묻어둔 듯 울지 말자고 다짐했는데도 괜스레 슬픔이 빗물처럼 스며든다. 가을이라는 계절은 왜 외로움과 고독을 불러들일까. 가을비는 유행가 가사로 쓸쓸한 심사를 달래 주곤 한다. 시인에게도 단골 소재가 되는 게 가을비다. 물론 가을비가 내리면 주위 풍경은 한층 더 고독하고 쓸쓸하게 보인다.
나는 비를 무척 좋아한다. 유년시절부터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고샅을 헤매고 다녔다. 이런 나를 보고 부모님은 청승맞다고 나무랐지만 중년이 된 지금도 하염없이 빗소리를 사랑한다.
때론 소나기가 아닌 보슬비가 내리는 날이면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거리를 실없이 쏘다닌다. 봄비는 따스함이 있어서 좋고, 여름 소나기는 시원해서 좋고, 가을비는 가슴을 후비는 것 같아 더 애잔하고, 겨울 찬비는 분위기가 있어 좋다.
밤은 그 검은 색으로 하여 인간에게 감추어진 본성을 드러내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다는 전제는 감춰두었던 원시의 본능을 하나씩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한치 앞이 보이지 않고 누구 하나 없는 그 태고의 숲으로 달려가게 한다. 그래서 밤엔 이불속에서 벌거벗고 원초적 본능으로 사랑을 속삭이게 되는지도 모른다.
다시 눈을 감고 사념에 젖어 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무얼 했고, 무얼 남겼는가.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다. 빈 공간 속에서 껍데기만 남았다. 살아온 삶이 허하고, 공망스럽다. 이 시간 부족한 것을 애써 찾아보지만 마음이 어수선하다. 그래서 무의미하고 무능한 내 몸에 심한 매질을 해본다.
깊은 밤 적막 속에 잠겨 오늘 하루의 삶을 돌아본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생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서 돌아가는 삶에 때론 회의가 느껴질 때도 있다.
인생은 고(苦)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뱅이는 가난뱅이대로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골치 아프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인생은 고(苦)다. 따라서 우리의 삶도 고(苦)의 연속이다. 하루가 30번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열두 번 모여 일 년이 되듯이 고(苦)의 세월이 모여 일생이 된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왕도가 없다. 어떤 면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말은 진실이다.
아귀다툼하고, 아옹다옹하고, 뭔가 남과 다른 걸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행복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삶의 종착역을 향한 인생 여정에서 우리의 삶은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전형적인 가을날이 시작될 것이다. 가을은 고독의 계절이다. 스산하게 부는 바람에도 괜스레 마음이 허허로워진다. 가슴이 공허하고 구멍 뚫린 심장으로 외로움이 새록새록 스며들어온다.
깊어지는 날, 빈 몸으로 허공을 나는 철새처럼 어제를 잊고 내일을 기대하는 노래를 남기고 싶다.
이 밤 나는 가을비 소리에 취해 우수의 철인 쇼펜하우어가 되어 있다.

신영규/전북문협신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