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높고 푸르다. 들판은 황금빛이고, 온 산은 오색 빛으로 물들어 있다. 그야말로 가을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총천연색의 아름다움을 마구 토해내고 있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 어제의 풍상을 잊은 듯 흰 구름 조각들이 한가로이 여행을 떠난다. 거친 비바람에 붉은 눈물을 흘린 사과나무들은 남은 것들을 위하여 짧은 햇살에 가슴앓이 하고 풀잎도 지친 듯 주저앉았다.

  길을 걷는다. 가을 길을 걷는다. 길을 걷다가 연갈색 바람을 만난다. 이내 코 속으로 흡입된 바람의 향기가 고소하다.

  다시 바람이 분다. 순간, 갈색 나뭇잎이 어깨를 살며시 스치더니 아스팔트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제물에 떨어진 낙엽을 보니 ‘대사일번 절후소생(大死一番 絶後蘇生)’이란 불교용어가 떠오른다. 직역하면 ‘크게 한 번 죽어야 다시 살아난다.’ 는 뜻이다. 그렇게 죽은 후에 자신을 버린 후에, 꿈은 다시 살아난다. 곱게 물든 단풍잎들은 꽃처럼 아름답지만, 떨어져 죽어야 한다. 그리고 뿌리로, 생명의 근원으로 다시 가서 새 생명을 피워야 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가을은 제2의 봄이다.

  사람의 일생도 일년의 사계와 비슷하다. 자라나는 어린이는 봄과 같고, 혈기왕성한 청년기는 여름과 같고, 일생의 결실을 이루는 중ㆍ장년기는 가을과 같고, 조용히 다음 세대를 준비해주는 노년기는 겨울과 같다. 특히 동양의학적 관점으로 사람의 일생을 견주어보면 더욱 그러한 상관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가을은 떨어짐(降), 성숙함(熟), 거둠(收), 건조함(燥), 슬프고 우울함(悲憂)에 해당한다. 가을은 안으로 뭉치고, 품안에 끌어안고, 한데 긁어모으고, 가라앉는 성격을 띤다.

  가을은 ‘외롭다’, ‘쓸쓸하다’는 형용사가 잘 어울리는 계절이다. 외로움이란 혼자 있을 때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가을은 일조량이 짧아져 인체의 생체리듬이 변화한다. 1차적으로 호르몬들이 영향을 받게 되고 2차적으로 뇌가 반응하면서 감정에도 미묘한 변화가 생긴다. 아침과 밤의 스산한 분위기가 완연하고, 해 저무는 황혼녘은 한결 더 쓸쓸하고 허무하다. 물론 사람은 계절에 관계없이 누구든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때에 따라서 짧고 가벼운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픔이 따르는 외로움을 느낀다. 공연이 끝난 다음 공연장에 혼자 남아있을 때 느끼는 외로움이 있을 수 있는 반면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처절한 외로움을 갖게 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외로움은 견디기 어려운 것인가? 혼자서 잘 살아가는 동물들도 있는데, 사람은 왜,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인가? 그건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기에 외롭고, 외롭기 때문에 인간이다. 인간만이 갖는 특수한 감정 때문이다.

  그런데 감정도 바이러스에 감염된다고 한다. 그것도 평생 치유할 수 없는 헤르페스와 같은 바이러스. 그 바이러스란 바로 ‘외로움’이다. 대부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외롭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외로움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연애를 해도 외로운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왜,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도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외로움은 아픔이다. 아픔은 위험을 예고한다. 너무 외로움이 심하면 병이 생기고 결국 생존에 위협을 받게 된다. 우리는 아픔을 피해가기 위해서도 절절한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깊은 외로움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비로소 도약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고 했다.

  이런 면을 고려하면 ‘위대한 창조자들은 혹독한 외로움 속에서 어떤 성과물을 얻었으며, 사람과 세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그들의 위대한 성취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위대한 창조는 곧 외로움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외롭지도 않는데 일부러 외로움을 사서 마음아파 할 필요는 없다.

신영규/전북수필 주간 겸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