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요즘이다. 한낮의 화창함은 봄 날씨와 방불하다. 그래서인지 때 아니게 개나리와 진달래가 서너 점 씩 핀 것을 보았다. 그래도 침침한 새벽이나 어두운 밤에는 쌀쌀한 바람이 분다. 며칠 전 계속되던 강추위 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옷깃을 여미게 한다. 특히 퇴근 때 고층 빌딩 아래를 걸어갈 때면 찬바람에 몸이 민감해진다. 천식이란 놈이 얌전히 있지를 못하고 쿨룩쿨룩 기침을 해대는 것이다. 그럴 때면 발걸음이 빨라지는데 바람이 덜한 쪽으로 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속으로는 조건반사처럼 생각나는 사람과 생각나는 곡이 있어 그걸로 위안을 삼는다.
겨울바람이 불 때 생각나는 사람과 생각나는 곡이란 늘 똑같다. 생각나는 사람은 쇼팽이고 생각나는 곡은 그의 작품 <겨울바람>이다. 쇼팽은 누구나 다 아는 대로 폴란드인이지만 생애의 후반부를 프랑스에서 보냈다. 프랑스에서의 생활은 그의 이름을 음악사에 찬연히 빛나는 별로 만들었다. 누나 같은 소설가 조르주 상드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주옥같은 곡을 많이 썼던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두 사람의 동거 관계는 결국 파탄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이별은 작곡가의 목숨을 단축하는 치명타가 되었다. 쇼팽은 불행했다. 그는 임종할 때 누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마토카! 모야 비엔나 마토카!” 라는 말을 남겼다. “어머니! 불쌍한 우리 어머니!”라는 뜻이다. 쇼팽의 시신은 프랑스에 묻혔지만 심장은 고인의 소망대로 폴란드로 옮겨져서 묻혔다.
쇼팽은 정서가 풍부한 피아노곡들을 많이 남겼다. 대부분이 소품들이기는 하지만 그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그래서 쇼팽은 짧은 생을 살다갔지만 역설적이게도 장수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폴란드 역사상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지동설의 코페르니쿠스도, 노벨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퀴리부인도, 자유노조지도자로서 세계 언론 매체의 주인공이 되었던 바웬사 대통령도, 명성에 있어서는 쇼팽을 능가하지 못하고 있다. 수 년 전에 세상을 떠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곧 그렇게 될 공산이 크다. 사람들은 존경스런 이름보다는 사랑스런 이름을 더 자주 떠올리고 더 자주 불러주기 때문이다.
<겨울바람>은 연습곡 25번의 열한 번째 곡이다. A단조 렌토 알레그로 콘 브리오 4분의 4박자. 이 곡을 들으면 초겨울 찬바람이 부는 길을 걸어가는 젊은이를 눈앞에 그려볼 수 있다. 그 길은 낙엽이 흩어지는 시골의 가로수 길일 수도 있고, 도시 변두리의 잿빛 아스팔트 도로일 수도 있다. 감상자에 따라서는 트렌치코트가 어울리는 고궁의 한적한 돌담길일 수도 있다. 그 젊은이는 처음에 두 손을 호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은 채 어깨를 움츠린다. 하지만 곧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이 가슴을 펴고 두 팔을 힘차게 내저으며 당당하게 걸어가는 것이다.
인생이 고달플 때 좋은 음악은 좋은 친구가 된다. 지방대학 졸업생들 중에는 아직 직장을 구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할 것이다. 이탈리아의 마우리지오 폴리니는 현존하는 피아니스트 중에서는 단연 최고의 대가인데 쇼팽의 연습곡에 관해서는 설명이 따로 필요 없을 만큼 전설적이다. 그는 지금 <겨울바람>을 연주하며 뜻이 맞는 친구들을 불러 초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