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는 없지만, 지울 수는 있는 것이 있다. 잊으려고 해도, 껌딱지처럼 트라우마로 남은 추억은 때론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청춘을 불사르며 학업에 전념하던 20대 후반에 만난 차00 형이 있다. 30대 중반으로 키도 훤칠하고 나름 빠질 것이 없었다. 게다가 그 어렵다는 ‘외무고시’ 1차에 2번이나 당당하게 합격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2차 시험과목 중 가장 어려운 외국어는 형을 괴롭게 하였다.

그래서 그 형과 내가 만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학습도서관 1층 대학원 열람실에는 많은 스터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어 시험과목을 선택한 형은 최선을 다해 열심이었던 기억이 뚜렷하다. 내가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을 공부한 것에 반하여 6개월 만에 거의 마스터에 이르는 경지를 보여주었다. 발음도 좋고 독해 능력도 작문도 수준급이었다. 그런데도 2차 시험을 보면 만점은 늘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어느 날인가,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비가 내렸던 날인 것은 분명하다. 우산이 없던 나는 비를 피하려고 서점으로 발길을 옮겼다. 책도 볼 겸, 시간도 때울 겸, 비도 피할 겸, 이런저런 이유로 서점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이 책 저 책을 섭렵했다. 다행히 중고서점이어서 사장님은 별말씀 없이 책을 읽는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눈을 들어 살펴보니 그 형이다. 그런데 무엇인가 세상을 씹어 먹을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 부담스러운 얼굴에 그늘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거 뭐야’ 하는 눈웃음으로 그냥 쳐다만 보고 있었다.

 

“야야, 박범 후배. 니, 여기서 뭐한다냐? 이 선배가 괴로워 죽겠는데, 서점에서 책이나 보고 있나? 도서관에서 내가 니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나, 모르냐, 사랑스러운 후배야”

“왜 그래. 형, 형도 내가 책 좋아하는 거 잘 알면서, 왜 그러냐니까, 형”

“……”

“나, 이번에도 2차에서 떨어졌다. 외무고시, 오늘 발표했어. 이름이 없더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제2외국어 때문인 것 같아. 아, 그놈의 일본어 만점이 그렇게 어려운 건지 미처 몰랐다. 과목을 바꿔 보아야 할 것 같아, 그래서 니와 상의하려고 찾았다. 왜”

“그래요. 미안해요, 형. 그러면 무슨 과목으로 불어나 독어? 네 생각은 무엇이 쉬울 것 같나. 내는 독어가 쉽더라고. ” <2편에 계속>

박여범 / 용북중학교·시인·문학박사·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