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현관을 지나 연구실 문 앞에서 나는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000 이름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러지?’, ‘아니야, 연구실을 잘못 찾아온 것인가?, ‘그래, 한층 더 올라가 보자’라며 가볍게 생각하고 이리저리 부산하게 움직였건만 찾을 수가 없다. 당황스러웠다,

어쩔 수 없이 학과 사무실을 찾았다. 낯설지 않은 사무실 분위기와 눈에 익숙한 풍경이다. 내 집처럼, 그곳을 드나들며 공부하던 시절이 가지런히 정리된 한 권의 앨범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과사무실은 문만 열린 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눈이 간 곳은 선생님의 공문과 우편물 사물함이었다. 

그런데 윗부분에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할 000 선생님의 존함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에 000이라는 낯선 이름이 내 눈을 가득 채운다. 그제야 머리를 스쳐 간 단어가 있다. 바로 ‘아, 정년?’ 아무리 정신없이 살아왔다지만, 이건 분명 치매 초기 증상임이 분명하다. 가족이나 친구와 농담으로 주고받던 ‘치매’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자신을 책망하며 서둘러 과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어, 박 선생 아니야? 오랜만이네?“라며 악수를 청하는 000 선생님의 얼마 남지 않은 흰머리가 정겹다. 준비되지 않은 어정쩡한 만남은 몇 마디의 형식적인 대화로 싱겁게 끝이 났다. 

이처럼, 세월의 흐름 속에 선생님의 정년퇴임이라는 씁쓸한 풍경 뒤에 파노라마는 아련한 미소에 잠기게 한다. 그해에도 장미는 흐드러지게 피웠다. 나른하게 졸리는 눈을 부여잡던 5, 6교시 수업이 떠오른다. 10분이라는 짧은 쉬는 시간이 되면, 인문대 뒤편 계단 주위 담배 연기는 오소리 잡기에 충분했다. 

3층 강의실 창가에 앉아 계단 주위를 내려다보면, 시끌시끌 사람 사는 냄새가 스멀스멀 우리의 코를 자극했다. 그 냄새는 바로 커피다. 담배 연기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남학생을 지나 동전 하나로 달달한 커피 한 모금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이처럼 시대의 아픔을 꿋꿋하게 피워 물던 자판기 커피와 담배 세대의 아련함은 이미 무심한 세월의 강이 되어 버렸다. <하편에 계속>

박여범 / 용북중학교·시인·문학박사·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