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한 사람의 어머니에게서 이 세상으로 건너온 존재다. 이 단순한 진실을 나는 어머니를 떠나보낸 뒤에야 가슴으로 알게 되었다.

어머님께서 하늘나라로 가신 지도 어느덧 이십 해가 흘렀다. 내 나이 또한 구순에 이르렀다. 세월이 흐를수록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지기보다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무 이유 없이 어머님이 몹시 보고 싶어진다.

그리움이 깊어질 때면 영정사진과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 든다. 사진 속 어머님은 살림과 농사일로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얼굴이다. 밭고랑처럼 깊게 패인 이마의 주름에는 자식들을 키우며 견뎌 온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노환으로 병환을 앓으실 무렵 찍은 사진 속 찡그린 미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고통이 지금도 전해지는 듯해 마음 한쪽이 저며 온다.

어머님은 자식 사랑이 유난히 깊은 분이었다.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자식들 먹이고 입히는 일만은 늘 먼저였다. 정작 본인을 위한 것은 늘 뒤로 미루셨다. 그때는 그것이 어머니의 당연한 몫인 줄 알았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 삶이 얼마나 큰 희생이었는지 가슴이 미어진다. 뒤늦은 깨달음은 언제나 후회로 남는다.

작고 여린 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어머님의 한 생애는 그 자체로 고단한 서사였다. 땀과 한숨으로 이어진 날들이 깊은 주름살을 만들었다. 그 주름마다 스며든 묵묵한 사랑을 나는 이제야 헤아린다.

어머님은 청송 심 씨로 부안 석포리 심촌에서 태어나셨다. 열여덟 살에 아버지와 혼인하여 한 가정의 며느리가 되었고, 그날 이후 삶은 오롯이 집안과 자식들을 향해 흘렀다. 말수가 적고 조용한 성품으로, 큰소리로 화를 내는 법 없이 참고 견디며 사셨다.

시댁은 전통 유교 문화가 깊은 내변산 노적마을의 종갓집이었다. 시조부모님과 시부모님을 모시고 네 남매를 키워야 하는 책임이 어머님의 몫이었다. 손에는 늘 일이 들려 있었고, 바느질 솜씨와 음식 솜씨는 마을에서도 손꼽혔다. 사람들은 어머님을 덕망 있는 분으로 존경했지만, 그 칭찬 뒤에 쌓인 고단함을 헤아리는 이는 많지 않았다.

남아선호사상이 짙던 시절, 늦게 태어난 손자인 나는 집안의 큰 기쁨이었다. 그만큼 어머님의 희생은 더 깊어졌고, 그 사랑은 말없이 쌓여 갔다.

고향 청림리 노적마을은 산과 물이 맑은 곳이다. 바람 소리와 물소리, 새와 풀벌레의 노랫소리가 어우러지는 그 고요 속에서 어머님은 평생 검소하게 사셨다. 아궁이에 불을 때실 때도 나무 한 토막이 아깝다 하시며 방의 냉기만 가실 만큼만 불을 지피셨다. 그 삶을 떠올릴수록 마음이 저려 온다.

아버님은 술을 즐기셨고,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작은 잔치를 벌이곤 하셨다. 그 모든 뒷바라지는 늘 어머님의 몫이었다. 아버님은 87세에, 어머님은 98세에 생을 마치셨다. 긴 세월을 사셨지만, 그 시간 대부분은 타인을 위한 삶이었다.

마을 뒤편 ‘구터’에는 한때 목화밭이 있었다. 늦가을이면 온 밭이 하얗게 물들었다. 어머님이 목화를 따고 계실 때 철없던 나는 숲에서 짐승 소리를 내며 놀라게 하기도 했다. 지금 그 자리는 조상들을 모신 묘지가 되었다.

고향에 갈 때마다 나는 어머님 묘소에 들러 술과 과일을 올리고 고개를 숙인다. 생전의 불효를 사죄하며 뒤늦게 마음속 말을 건넨다.

어머니! 꿈속에서라도 다시 한번 뵙고 싶습니다. 어머님께서 제게 주신 사랑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립니다.

고 재 흠 / 수필가 

**고재흠 수필가는 2000년 월간 '문학공간'으로 등단해 한국신문학인협회 전북지회장을 역임했다. 수필집으로 '초록빛 추억' 외 5권, 칼럽집으로 '한민족의 문화' 등 2권이 있다. 전북수필문학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부안군민대상문화장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