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 된 후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여러 정치세력이 난무했던 여파는 고창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또는 이를 혼합한 여러 정치 집단들은 각자의 이념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그들 나름의 방법대로 고군분투했다.
고창지역에서 특히 괄목할 만한 세력은 사회주의 세력이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자생적으로 혹은 일본 등에서 수입된 사회주의 운동은 노동자 농민들의 권익을 위해 다각적인 운동을 펼쳐왔고, 빈민층 구제를 위해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사업을 한다든가 야학을 열어 문맹을 퇴치하는 건설적인 운동을 진행해왔다.
농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고, 해방 이후 남로당으로 정치세력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자들은 남로당으로 흡수되었다.
그러나 제주와 여수 순천에서 좌익 세력에 의해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돌자 비교적 좌익을 우호적으로 바라봤던 눈길들이 비틀어졌다.
1949년 가을 무렵, 박규환과 연기댁은 간단한 무구와 장구를 짊어지고 같은 마을의 정씨 집 굿을 하러 가기 위해 싸리문을 나섰다.
골목을 돌아 마을 광장을 건너가고 있는데 박대우가 마을 회관에서 나왔다. 박대우는 적극적이며 활동적인 청년이다.
사회주의 계열인 고창청년회에서 운영하는 야학에서 공부했고 자연스럽게 사회주의를 배웠으며 노동자 농민들이 가진 자와 권력자들에 의해 얼마나 핍박받는지에 대해 체득하게 되었고 남로당이 결성되자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하였다. 남로당 무장면의 책임자가 되었고 마을에서는 이장을 하고 있었다. 동네에서 그를 따르는 젊은이가 많았다.
박규환과 박대우는 동성동본으로 가까운 친척이며 항렬이 같지만 박규환이 일곱 살이 더 많다. 평소 박규환은 농민들의 권익을 위해 일하는 박대우를 좋게 보고 있었다. 박대우는 박규환 내외를 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형님, 어디가세요?”
“대산댁네 굿하러 가지. 요즘 정치 일 하느라 바쁘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근데……, 형님 이제 굿은 그만 하시지요.”
박대우는 어렵게 꺼내는 말인 듯 박규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고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고 있어요. 종교라는 것은 반동적이고 비과학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어 혁명하려는 의욕을 없애거든요. 굿은 더 그렇지요. 합리적인 판단 능력을 떨어뜨리고, 계급을 무너뜨리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데 걸림돌 같은 존재거든요. 우리 공산주의에서는 신앙을 허용하지 않고 있고 더군다나 굿은 전면 금지하고 있어요. 혁명에 지장이 있어서요. 우리 마을은 대표적인 공산주의 의식을 좇고 있는 마을인데 굿을 하면 되겠어요?”
처음엔 조용조용 천천히 말을 하다가 스스로에게 고무되었는지 박대우는 목소리를 높였고 연단에 서서 청중들을 향해 연설하듯 박규환에게 일갈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굿이라는 게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줬으면 줬지 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잖아. 농민을 위한다는 자네가 그걸 반대한다니…… 어이가 없네 그려.”
“아직 공산주의 학습이 덜 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도 공산주의를 더 학습하면 굿 같은 미신 짓거리는 하지 않을 거예요.”
‘미신 짓거리’라는 말을 듣자 박규환은 얼굴이 벌게졌고 연기댁은 노래졌다.
“미신 짓거리? 자네, 지금 말 다했나?”
“형님부터가 반동적이고 비과학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말입니다. 미신일 뿐이라고요. 미신요!”
“이 사람이 정말…….”
박규환은 짊어지고 있던 무구와 장구를 벗어놓고 박대우의 멱살이라도 움켜잡으려 했다.
오상근 / 본보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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