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늦가을의 심연

아침저녁으로 스치는 바람은 이제 서늘함을 넘어 살갗을 파고든다. 가을은 어느새 끝자락에 서 있다. 늦가을의 그림자는 삶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고, 희미한 햇살 한 줄기조차 느티나무 실핏줄 같은 가지에 걸려 힘없이 흔들린다. 거무스름한 바람은 햇살 사이에서 길을 잃고, 회색빛 조각구름은 하늘을 무심히 스쳐 지나간다. 빛은 점점 세기를 잃고, 자연은 천천히 제 색을 거둬들인다.

차를 몰고 도심 한복판을 달리다 보면, 떨어진 은행잎들이 바퀴에 스치며 허공으로 흩날린다. 마치 마지막 춤을 추듯 금빛 잎사귀는 바람을 타고 부유하다 사라진다. 늦가을의 도시는 그렇게 짧은 황금빛 비를 흩뿌리며, 계절이 퇴장하기 전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나는 그 기묘한 풍경 앞에서 잠시 속도를 늦추고, 사그라져가는 계절이 들려주는 은밀한 작별의 언어에 귀 기울인다.

아침과 저녁의 빛은 여전히 신비롭지만 한층 누그러져, 마치 저무는 생이 마지막 숨을 고르는 듯하다. 하늘은 높고 텅 빈 듯 쓸쓸하며, 길가의 마른 풀밭에는 소리가 사라져 고요만이 가득하다. 세상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겨울은 문턱 너머에서 조용히 기다린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모든 것이 침묵 속으로 가라앉고, 그 침묵은 생의 끝을 알리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지만, 늦가을의 그리움은 더욱 깊고 차분하다. 그것은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이 아니라, 더는 닿을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스며드는 조용한 슬픔이다. 그리움은 마음속 상처가 봉합되지 않음을 인정하는 일이며, 그래서 그리움은 감옥과도 같다. 늦가을의 그리움은 그 감옥마저 차갑게 식어버린 절망에 가깝다.

늦가을은 이별의 계절이기도 하다. 나뭇잎들은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고, 어떤 나무는 앙상한 가지만 남아 고독을 온몸으로 견딘다. 봄이면 새잎이 돋겠지만, 올해 떨어져 나간 잎과 가지는 다시 서로를 볼 수 없다. 인간의 이별 또한 이렇게 덧없이 사라져 간다.

또한 이 계절은 사색을 부른다. 늦가을의 사유는 더욱 깊고 묵직하다. 생이 서서히 쇠락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삶과 사랑, 그리고 결국 끝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 다시 자문한다. 그래서 가을은 철학의 계절이며, 생각의 끝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기 내면을 마주한다.

늦가을은 공허하다. 고독은 이 계절의 필연이다. 그 공허 속에서 마음 한 켠은 매일 조금씩 깎여 나가는 듯하지만, 나는 고독을 피하지 않는다. 이미 그 쓸쓸함에 익숙해진 탓에 오히려 그 심연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싶다.

해가 짧아지고 일조량이 줄어드는 이때, 나는 해마다 찾아오는 우울과 다시 마주한다. 세로토닌이 줄어 마음이 무거워지는 탓도 있겠지만, 어쩌면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자리 잡은 외로움의 유전자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을을 타는 것은 남자라는 속설이 있지만, 늦가을은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우울은 누구의 마음 깊은 곳에서도 떠오르는 그림자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늦가을의 남자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바라보며 조용히 시간을 견딘다. 갈색 코트에 스민 냉기는 얼굴보다 더 깊은 쓸쓸함을 품고, 벤치에 앉아 눈을 감으면 낙엽은 바람에 실려 흩날리다 이내 발끝에 고요히 쌓인다. 비라도 내려 그 낙엽이 젖기라도 하면, 내 마음도 함께 젖어 더욱 무겁게 가라앉을 것이다.

이 계절만 되면 이유 없이 마음이 무너지고, 때로는 눈물이 차오른다. 세상과 나 사이에 바람 한 점 없는 정적이 깔리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데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스민다.

어느 늦가을 날, 거의 다 떨어진 나뭇잎이 흩날리는 길을 걷다 문득 눈물이 돌았다. 남아 있는 잎이 몇 장 되지 않는 나무는 더욱 적막했고, 발밑을 스치는 낙엽 소리는 공허함을 한층 증폭시켰다. 늦가을은 정말 눈물의 계절인가.

늦가을 밤의 어둠이 짙게 깔린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마음은 심연의 끝자락에서 얼어붙어 있다. 그 순간, 가을이 나에게 속삭인다.

“그래도 괜찮아, 생각은 자유니까.”

신 영 규/시인·수필가

**신영규 수필가는 1995년 월간 《문예사조》와 1997년 월간 《수필과비평》으로 등단하여 시·수필·칼럼을 쓰고 있다. 수필집으로 《그리움처럼 고독이 오는 날》외 1권, 에세이 집으로 《삶에게 묻다》, 첫 시집으로 《바람도 꽃피는 계절이 있다》, 칼럼집으로 《침묵은 누구의 편인가》 외 4권이 있다. 현재 전북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장과 순수필동인 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