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입고 나서는데 박창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 자는 동식이 온천탕에서 몸을 개운하게 씻은 것을 언제 알고 이렇게 때를 맞춰 전화하는지 모르겠다. 

이전 통화에서 동식은 만나자고 했고 박창수는 일정을 잡아서 전화를 하겠다고 했다. 동식을 만나려고 전화한 건가. 온천 뜨거운 물로 늘어질 대로 늘어진 안면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만납시다.’

전화를 받자마자 박창수가 말했다. 만납시다, 단 네 개의 음절이었지만 하나하나 음절의 무게는 며칠 전 아산면 반암리 호암마을에서 봤던 병바위 크기만큼이나 무겁게 동식의 몸을 짓눌렀으며 두꺼운 밧줄이 되어 동식의 목을 칭칭 감아 언제든 힘을 주면 동식의 숨통을 끊어버릴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박창수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는 짓은, 동식이 애호하는 말보로의 흩어지는 담배 연기가 아니다. 현실이며 실전이다. 

무거움 때문에 얼굴 근육을 찌푸렸지만 곧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정상적인 얼굴을 했고, 결기까지 띤 표정으로 변했다. 비즈니스로 연장을 들고 작업을 하러 갈 때처럼 온몸의 근육이 팽팽해지는 느낌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동식이다. 위험이 도사리는 작업 현장에 한두 번 출동해본 게 아니다. 동식의 비즈니스는 위험이 독사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기습해올지 모르는 어두운 뒷골목을 뛰어다니는 일이다. 

박창수의 의뢰건도 마찬가지다. 조금 부피만 클 뿐이다. 고창읍성을 매일 돌다가 선운산을 트레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업무의 강도가 약간 셀 뿐 어차피 같은 비즈니스니까. 

어디까지나 비즈니스다. 본능적으로 착수금 생각이 머릿속으로 슬며시 끼어들었다. 

“착수금은 준비되었소?”

‘준비되었소.’

시원시원해서 좋다. 

“어디서 만날까요?”

‘무장에 오면 도곡리 시목동 마을이라고 있소.’ 

“도곡리 시목동 마을요?”

‘그 마을 경로당 길을 타고 올라오면 계곡길로 올라가는 길이 있소. 그 계곡길에 차를 받쳐놓고 기다리겠소.’

사람들 눈을 피하기 위해 깊은 마을구석 어디서 만나자고 하는 건가. 그런데 왜 하필이면 무장면인가. 요즘 자꾸 무장면이 동식의 주변에서 얼씬거리고 있다. 

“언제 볼까요?”

‘지금 올 수 있소?’

만나자는 것은 뜸을 들이더니 만나기로 정하자마자 당장 만나자고 하는 건 무언가. 

어차피 시작하려던 미룰 필요가 있나. 동식은 알았다고 말하고 곧바로 박창수가 말했던 무장면 도곡리 시목동 마을을 내비게이션에 입력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해는 천천히 구시포 해안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음지는 이미 어둑어둑해졌다. 들녘은 황금빛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가로수와 산을 덮고 있던 녹음들은 잎을 하나둘 떨어뜨리며 조금씩 바래가고 있었다. 

15분 정도를 달려 박창수가 알려준 장소에 도착했고 어렵지 않게 박의 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박에게 전화를 넣었다.

“어떻게 만날까요?”

‘내 차 쪽으로 오시오.’

이거 혹시 유인하는 것은 아니겠지. 나쁜 쪽으로 생각이 들었다. 연장이라도 하나 들어야 되는 건가. 

하지만 동식의 육감으로 판단할 때 박이 장난을 치는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무엇보다도 전화 목소리가 진지했다. 그냥 가볍게 처신하는 음성이 아니었다. 

일시적인 화를 참지 못하고 일을 청부하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묵어 있던 뭔가를 꺼내는 그런 목소리였고 그런 의지가 음성에 담겨 있었다. 

동식은 주변을 둘러봤다. 어둠이 마을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차 문을 열고 나서자 스산한 가을바람이 뒷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