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는 11월 초, 한국 문자 예술의 거목 효봉(曉峰) 여태명(余泰明) 서예가의 특별 초대전 ‘송. 죽. 석. 삼우전(松. 竹. 石. 三友展)’이 전북 전주기독교근대역사기념관에서 감동적인 개막식을 열었다. 

이번 전시회는 전주예수병원이 주최하고 (사)한국장애인교육협회와 K-news가 주관하며, 전주MBC프로덕션, 내쇼날 모터스, 진안군의회, 완주군의회, KBC지방자치TV전북방송이 후원하고 한국복지신문이 기획해서 지난 3일부터 시작해서 오는 28일까지 열린다.

특히 이번 전시회는 단순한 예술 감상을 넘어, 한 예술가가 평생 탐구해 온 한국인의 정신과 글씨의 혼을 집대성하며, 우리 민족의 변치 않는 삶의 가치와 역사적 염원을 담아내는 감동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의 핵심 주제인 ‘송. 죽. 석. 삼우(松. 竹. 石. 三友)’는 예로부터 변치 않는 선비 정신의 상징이었다. 

효봉 여태명 작가는 이 세 벗, 즉 소나무(松), 대나무(竹), 돌(石)을 통해 인간의 윤리(倫理)를 탐구하고, 이를 민족의 덕목으로 승화시킨다. 그가 발견한 울림은 깊고 명확하다. 소나무의 불굴함, 대나무의 불욕함, 그리고 돌의 불변성이 "우리 한민족 그리고 민초들의 DNA가 아니던가" 하는 통찰로 이어진다. 

이는 곧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굳건히 제자리를 지켜온 백성들의 정신을 문자 예술로 기록하려는 작가의 치열한 노력이 응축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여태명 작가는 평생 한글 민체를 연구하며 그 역사적인 배경과 흐름을 정리해 온 독보적인 학자이자 예술가로 추앙받고 있다. 

그가 서예의 본질에 대해 오랜 시간 번뇌하며 괴로워하다 만난 세계는 바로 "백성들의 글씨"였다. 작가는 민간에서 형성된 ‘민체’야말로 "한글의 생명력과 공동체의 정신을 간직한 진정한 예술“이라고 정의한다.

옛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온 정성을 들여 썼던 글씨를 수집하고 연구한 결과로 탄생한 민체에는 비록 정통 서예의 기교(技巧)는 없을지라도, 절제된 균형과 자연스러움, 그리고 호탕한 기상(氣像)이 숨어 있다. 

작가는 이 민체를 통해 가장 감동적인 진실을 선언한다. 

"이 민체에는 우리들의 삶이 있고, 고통이 있고, 사람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이는 정통 서예의 틀을 깨고 개성과 성정에 따른 독창성을 중시하며,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다양한 ‘표정’을 글씨 속에 담아내려는 시도다.

효봉 여태명의 예술은 단순히 벽에 걸려 감상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작품이 수장고에 갇혀 있기보다 "유리창을 깨고 나와 실생활에 쓰임새가 있기를" 바라며 생활 서예를 시작했다. 

이러한 백성의 마음을 헤아려 글과 소통해야 한다는 민체 정신은 오늘날 캘리그래피가 태동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캘리그래피 초대회장을 역임하며 기틀을 다졌고 현재는 명예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실천적 철학은 민족적 염원을 기록하는 역사적인 순간에 가장 빛을 발했다.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 당시, 기념 표지석에 새겨져 전 세계인을 전율케 했던 문구는 바로 '평화와 번영을 심다'였다. 

여러 서체 중 최종적으로 채택된 것이 효봉 여태명의 민체였다. 처음에는 "어떤 사람이 이런 글씨를 쓰겠느냐"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지만, 결국 민중의 땀과 삶이 담긴 이 글씨가 ‘남북 평화’라는 민족의 숙원을 기록하는 역사적 현장에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이 순간은 예술가가 단순한 기술 복사에 그치지 않고, 백성의 글을 살펴 소통하려 했던 그의 실천적 철학이 역사적 사명을 완수한, 가장 감동적인 증거이다.

 

또한 전주를 오가는 모든 사람이 보게 되는 전주 톨게이트 현판 글씨도 여태명 서예가의 작품으로 그의 글씨에는 언제나 의미와 마음이 담겨 있다.

이 작품에 대해 여태명 서예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전주로 들어갈 때는 ‘ㅈ’을 작게, ‘ㅓ’를 크게 썼어요. 자음은 자식이고 모음은 어머니입니다. 엄마 품에 안기는 자식의 모습이지요. 반대로 전주에서 나갈 때는 ‘ㅈ’을 크게, ‘ㅓ’를 작게 썼어요. 자식이 세상 속에서 건강하게 성장하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여 서예가는 이처럼 자신이 쓰는 작품의 서체 하나 하나에도 철학과 온기를 불어넣어 작업을 하는 분이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글씨에 담아 전하는 것. 그것이 그의 서예를 하는 진정한 마음이자 정신이다.

이번 전시에서 여태명 작가는 ‘글씨 같은 그림, 그림 같은 글씨’를 주제로, 시와 한글 서예와 그림이 먹과 붓으로 만나 ‘아우름’으로 녹아내리는 새로운 차원의 예술을 선보였다. 

문자가 회화로, 회화가 문자로 승화되는 지점에서 예술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작가의 확고한 의식이 담겨 있다. 특히 한글의 근본인 천(天)·지(地)·인(人) 삼재 사상을 바탕으로 한 ‘천지인 시리즈’와, AI 시대를 맞이하여 한글 자모의 분리와 해체를 시도하는 문자 추상 예술은 서예가 동시대 시각예술의 중요한 축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을 보여준다.

고희를 앞둔 노 서예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제작한 작품전인 이번 예수병원 초대전은, 선조들의 좋은 전통을 이어받아 "뭔가 더 보태고 아름답게 가꾸고 물려줘야 한다"는 작가의 고집스러운 염원을 담아내고 있다. 

그의 예술은 문자에서 회화로, 회화에서 다시 정신세계로 나아가는 탐구의 여정이며, 동양 서예의 전통과 현대 미술의 실험정신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독자적 조형 언어이다.

백성의 삶을 헤아리는 글씨를 통해 시대를 기록하고 미래를 꿈꾸는 효봉 여태명의 진한 묵향 속에서 우리는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옛 시인의 시구처럼, 요즈음처럼 각박한 세상사 속에서 '송. 죽. 석. 삼우'야말로 우리가 가장 사랑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전주예수병원이 주최한 이번 특별 초대전은 효봉 여태명 작가가 구축한 한국서예의 정체성과 미래를 제시하는 선언문과 같다. 

예술에 관심 있는 모든 도민들에게, 그의 '보는 언어', '느껴지는 정신'을 통해 삶의 고통과 희망이 살아 숨 쉬는 문자 예술의 깊은 울림을 느껴보시기를 권하며 많은 관람을 원한다. /이만호 기자

<부록>서예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다… 여태명 서예가는?

붓끝에서 피어나는 먹빛의 숨결, 그 한 획 한 획마다 인간의 혼과 시대의 정신을 담아내는 작가인 여태명 서예가는 1956년 전북 진안 백운에서 태어났다.

전주고등학교 재학중 미술부 활동으로 예술의 싹을 틔우고, 전주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학과 한국화 전공을 졸업한 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하며 예술의 깊이를 더했다.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서예과 교수로 30여년간 재직한 그는 현대 서예의 새 길을 연 인물로 널리 평가받는다. 

조선시대 서민들이 썼던 친근한 필체를 연구해 ‘민체’, 곧 ‘여태명체’를 창안했다. 그 글씨는 화려하지 않으되 따뜻하고, 정제되었으되 자유롭다. 그는 한글 서예를 예술의 전당에서 거리의 일상으로 끌어내며, 민중과 함께 숨 쉬는 서예를 꿈꾸었다.

그의 발자취는 한국을 넘어 세계로 뻗었다. 독일 베를린 교통역사박물관, 중국미술관,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파브리아노 등 세계 곳곳에서 개인전과 초대전을 열며 한글의 아름다움을 세계 무대에 알렸다. 

특히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표지석에 새겨진 ‘평화와 번영을 심다’는 문구는 그의 붓끝에서 태어나 역사적 순간을 기록해서 전 세계인이 열광했다. 

또한 대통령 전용기 ‘대한민국(KOREA)’ 휘호, 대둔산 동학혁명 전적비와 전봉준 장군상, 김영랑 시비의 글씨 등 수 많은 기념비적 작품들이 그의 손끝에서 완성됐다.

여태명 서예가는 전통 서예의 정신을 지키면서도 현대 디자인과 캘리그래피, 폰트 개발 등으로 예술의 외연을 크게 넓혔다. KBS 「1박 2일」, YTN 「돌발영상」의 타이틀 글씨, 국순당 ‘명작’ 라벨 디자인, 여러 언론사의 제호 등에서도 그의 서체를 만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서예관을 이야기하며 “서예는 박물관 속에 갇힌 유물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숨 쉬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태명 서예가는 전라미술상, 동아미술상, 한국미술상 등 수많은 상을 수상하며 예술적 공헌을 널리 인정받았다. 

현재 천안에 거주하며 태명예술공장이라는 제호의 작업실에서 창작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지금도 원광대학교 명예교수로서 후학을 이끌고 있으며, 한국민족서예인협회 회장,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명예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그의 삶은 예술이고, 그의 예술은 곧 인간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다. 한 줄의 먹빛에 세상의 숨결을 새기고, 한 글자의 곡선에 인간의 진심을 담는 여태명 서예가, 그는 오늘도 조용히, 그러나 굳건히, 먹빛의 길을 걸으며 한글의 혼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