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 이어>방학을 맞은 아들이, 새벽부터 알 수 없는 조용한 정리에 부스스 눈을 부미며 다가온다. 아버지의 낯선 행동에 당황한 눈치다. 그러면서, 방바닥에 정리한 책을 보며 미소를 보낸다.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일까?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동안 그래왔다. 아들은 이번에도 나의 ‘공부방’ 정리가 쉽지 않음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오아시스처럼, 그렇게 새벽부터 비다

열대야를 시켜줄 소리만 요란한 비다

뒤통수를 갈겨주는 시원한 소나기다

이 비가 그치면, 미친놈처럼 해벌쩍 웃으며

동네 한 바퀴 비가 남긴 흔적을 찾아 비우려 한다

긴 세월의 흔적을 지우려 한다  

집착을 애정이라 착각한 자아는 거미보다 못하다

더 얇은 비움이 되지 말자

사이다 같은 햇비를 가득 담은 공간이 비움이다

그 몫은 당신, 바로 너와 나다      -박여범, ‘비움’ 전문-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시간과 약간의 돈만 있어도 서점에 들러 책을 보고 한 두 권을 사와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책이 쌓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었다. 공부방 가득 가족이 된 그들을 바라보면 배가 불렀다. 그런 책을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심이다. 그러나 이제는 긴 세월의 흔적을 지워야 할 때이다.

눈만 뜨면 변해가는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를 고집하는 것은 소모전이다. 꼰대의 시각으로 그 시대에 집착하는 애정은 집착이다. 진정 책을 사랑하는 최후의 생존자인 한 마리의 거미보다 못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이런 내가 부끄럽다. 그래서 과감하게 비워보려 한다. 더 이상 얇은 비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사이다 같은 햇비를 가득 담은 공간을 확보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몫은 당신, 바로 너와 나다. <끝>

박여범 / 용북중학교·시인·문학박사·문학평론가